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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는 밤

etc. 2023. 11. 21. 00:38

발더스 게이트 - 다크 어지 x 카를라크 로맨스

티플링 다크 어지 배경, 캐릭터 고유 이름 있음

다크 어지 3막 스토리 스포일러 포함

 

*

 

  야영지는 고요했다. 동료들 모두 개인 천막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분위기에 영향 받았는지 덩달아 스크래치도 동그랗게 몸을 만 아울베어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이해할 만했다. 오린을 죽이고 마침내 네더스톤 3개를 모았다는 흥분도 잠시,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엘더 브레인을 마주하는 것 뿐. 느슨해졌을 속박을 생각하면 머뭇거리거나 추스를 틈도 없었다. 결전을 준비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밤, 그게 오늘이었다.

 

  활줄을 갈고, 류트 조율을 마치고, 화살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큰 전투를 앞두고 늘 하던 일상적인 행동에도 묘하게 긴장이 스며 있었다. 부족한 물약을 채워넣고 마지막으로 가방끈을 단단하게 동여맨 뒤, 라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 말고,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은 따로 있는데. 라샤는 자신이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저녁을 혼자 먹겠다는 핑계로 개인천막으로 빠져 나가면서도 등 뒤가 따갑게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카를라크와 이야기 해야하는데. 미루거나 외면할 시간조차 사치라는 걸 아는데도, 라샤는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신병, 안에 있어?"

 

  아, 언제나 한 발 앞서 나가는 그의 연인이란. 망설이며 낭비하기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라샤는 천막 입구를 살짝 들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연인의 주홍빛 눈을 마주했다. 들어오라는 손짓에 카를라크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좀 걷자. 오늘 별이 잘 보이네."

 

  그들이 정한 야영지는 도시 북쪽의 숲 속에 있었다. 너른 공터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동료들의 천막은 거의 문이 닫혀 있었지만 불빛이 여전히 새어 나왔다. 다들 쉽게 잠들 수 없을 터였다. 라샤와 카를라크는 사람들의 발길로 빚어진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어슴프레한 별빛만으로는 어둠을 밝히기 부족했지만 티플링 두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따금 정적을 깨는 풀벌레 소리 외엔 적막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있잖아,"

  "저기,"

 

  야영지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걷는 동안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주고 받았다. 카를라크가 먼저 살풋 웃으며 라샤에게 우선권을 양보했다. 서두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몇 번 입을 달싹이던 라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날 밤, 네가 내 곁을 지키던 밤에 있잖아."

  뚜렷하게 지칭하지 않음에도 카를라크는 즉시 라샤가 말하는 '그날 밤'이 언제인지 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인데도 어쩐지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그날의 일. 터져나오는 어두운 충동을 이겨내려 사투하던 라샤를 묶어두고 지켜보던 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욕과 비명을 한 귀로 흘리며 끝없이 사랑한다 속삭이고, 몸부림치는 그를 품에 안고 다독이던 밤. 카를라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던 그 밤의 일은, 두 사람 사이에서 금기처럼 피해지는 주제였다. 카를라크가 이 자리에서 듣게 될 거라 생각한 주제는 아니기도 했고.

  "나는... 그때 이미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 혹시라도 나를 갉아먹는 어둠이 내 통제를 벗어나는 날이 온다면, 그래서 더 이상 네가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면,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카를라크의 발걸음이 잠깐 멈칫, 했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의 시선은 걷고 있는 자신의 발끝에 머물러 있었다. 라샤 역시 카를라크를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잠시 반응을 기다리던 라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네게 물었었지.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거냐고.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죽음을 택할 만큼."

  이 또한 그들이 외면하던 묵은 주제 중 하나였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사랑만큼 불안과 두려움이 차오를 때면 라샤는 카를라크에게 아베르누스로 돌아가면 안 되냐고 물었고, 아무리도 달콤한 사랑의 말과 기약 없는 미래의 약속을 주고 받는 와중에도 카를라크는 한결같이 단호하게 거절로 일축했다. 일시적인 거라고, 아베르누스에 가서 심장을 고칠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몇 번이고 되물어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묻는 라샤의 절박함을 아는지라 카를라크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 단단함에 지쳐 화내는 건 도리어 라샤 쪽이었다. 감정이 격해져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는 거냐며,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냐고 비수 같은 말을 쏟아낸 일도 있었다. 감언이설도, 폭언도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을 쯤에야, 라샤는 더 이상 그 일을 화제에 올리지 않게 됐다. 어차피 그들은 당장 내일에라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삶을 사는 모험가들이었다. 미래에 대한 달콤한 약속은 시한폭탄 같은 심장이 없는 이들에게도 사치인 세상인 것을. 그런 라샤가 지금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리는 이유는 카를라크도 익히 알고 있었다. 바로 오늘, 카를라크는 라샤가 죽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온몸을 짓누르는 살인의 군주의 존재감과 영혼을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카를라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슬레이어와 싸우느라 만신창이가 된 그의 연인이 자신의 창조주를 마주하고, 신의 명령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절대자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피웅덩이 위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 어떻게 그의 심장이 그 순간에 재가 되지 않았는지는 카를라크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위더스가 나타나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독백을 하며 라샤에게 다가갈 때까지도 카를라크는 눈앞의 상황을 머릿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바알의 아이가 죽었다. 살인의 군주의 선택 받은 자가 되길 거부하며, 내면의 어두운 충동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그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이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인가. 그야말로 영웅의 귀감 같은, 그야말로...

 

  현실과 유리된 이성의 목소리가 늘어놓는 말 같지도 않은 찬양은 현실도피를 위한 일말의 발악이었다. 그의 실제 내면은 그저 끝없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어. 왜 네가. 어떻게 여기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리고 라샤가 다시 눈을 떴다.

 

  위더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카를라크의 눈에 들어오는 건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카를라크를 바라보는 라샤와, 그를 발견하자 빛을 되찾는 파란 눈동자 뿐이었다. 그저 그뿐인데, 카를라크는 그제야 자신의 심장이 다시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계로 된 심장이니 정말 잠시 멈췄었는지도, 그대로 두었다면 과열로 그 자리에서 불타버렸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해냈어. 자유를 찾은 거야. 네가 미친 듯이 자랑스러워."

 

  웃으면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품에 그대로 끌어안고 정말 그가 괜찮은지, 온전히 살아난 게 맞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라샤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전투의 여운을 음미하며 야영지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 할 때까지, 카를라크는 라샤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도무지 평소 같은 마음으로 라샤를 대할 자신이 없었기에. 라샤 역시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기 바빠 그런 카를라크를 굳이 찾지 않았고.

  그들이 걷던 숲길은 작은 호숫가를 마주하고 커다란 그루터기가 놓인 공터로 이어졌다. 근처 사는 연인들의 밀회장소로 쓰일 법한 곳이었다. 카를라크는 사람들이 앉은 흔적으로 반들반들해진 그루터기를 향해 손짓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자 작은 그루터기가 빠듯하게 채워졌다.

 

  "...미안해."

 

  발끝만 바라보며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라샤가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은 사과였다. 카를라크는 그제야 연인의 얼굴을 돌아봤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물든 두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보였다. 카를라크는 허둥거리며 벌떡 일어나 라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사랑, 왜 사과하는 거야?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아니, 아니야. 카를라크, 나는... 몰랐어. 그게 어떤 일인지. 어떤 마음으로 네가 그런 말을 했던 건지.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던 때에도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으니까. 구름낀 듯한 기억 속을 되짚으며 내가 행했던 끔찍한 일들이 덩굴처럼 수렁으로 나를 끌어들일 때에도, 나는 살고 싶었어. 내가 누구였는지 모른다면, 내가 앞으로 행하는 일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해주는 거라 자위하며, 모든 걸 덮어놓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카를라크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카를라크는 라샤의 우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의 독백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네가 그런 내 길을 밝혀줬어. 너는 빛나는 사람이야, 카를라크. 네 심장을 불태우는 파란 불빛 때문이 아니야. 너는 정말로, 태양 같은 사람이야.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고, 모두에게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기꺼이 네 자신을 불태우는. 그래서, 나도 네가 세상을 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내가 과거에 어떤 끔찍한 사람이었을지라도 그 빛으로 나를 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

 

  아, 하지만 얼마나 순진한 기만이었던가. 그가 그저 '끔찍한'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그저 잘못된 길을 들어 악행을 저지르다 사고로 기억을 잃은 평범한 악당이었다면, 과거를 후회하고 속죄를 추구하는 삶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살인의 군주가 직접 빚은 그의 피조물은. 의심 없이 자신의 선택 받은 소명을 믿고 따르던 그의 과거는. 태어난 순간부터 부정한 그의 존재는.

 

  그저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심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탓에, 라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바알에게 복속돼버리고 나면 나는 더 이상 네가 아는 라샤가 아니겠지. 네가 사랑하는 이 세상을 지킬 수도 없을 거고. 모르겠어, 너라면 그런 나라도 살아서 함께 있어주길 바랐을지도.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만큼, 그렇게는 할 수 없었어."

 

  카를라크가 어떻게 그 마음을 모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단어 뒤에 올 수 있는 수많은 말들. 비장하게 장애물을 극복하겠다는 결심이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체념이든. 라샤는 후자를 택한 것이다. 생의 의지를 넘어서서 스스로 믿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상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엔 익숙한 카를라크였지만, 라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의 가슴 속에서 문득 치미는 열망이 느껴졌다. 그 순간, 라샤가 쓰러지는 그 순간에는 누구도 그가 다시 살아날 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때, 라샤가 본인의 선택을 앞두고 카를라크에게 어떻게 해야겠냐고 물었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살인의 군주의 도구가 되어 세상을 살육의 바다로 만드는 삶을 살지, 고귀한 영웅으로서 죽을지, 연인인 그에게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다면.

 

  "라샤, 내 사랑."

 

  어느 새 카를라크의 얼굴도 라샤와 똑같이 눈물범벅이 돼 있었다. 타오르는 심장만큼 뜨거운 두 손이 눈물에 젖은 연인의 뺨을 감싸안았다.

 

  "그 자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네가 정말로 자랑스러워. 그 누구도 그 순간에 그렇게 용기 있는 선택을 쉽게 내리진 못했을 거야. 혹여 네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해도, 그 누구도 널 탓하거나 재단할 수 없었을 거야. 아마 나는 네 선택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카를라크의 이마가 라샤와 맞닿았다. 말하는 숨결과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라샤에게 전해졌다.

 

  "네가 살기를 바랐을 거야. 내가 그 자리에서 널 말릴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 살인의 군주에게 내 심장을 바쳐서라도 널 지켜냈을 거야. 네가 이렇게 살아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감사하지만, 혹시라도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불타버렸을 거야. 분명히. 널 내 눈앞에서 잃는 순간,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어. 아베르누스의, 아홉 지옥의 겁화를 끌어다 영혼 위로 쏟아 붓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다 잘 풀렸으니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라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는지 알고, 그 결과가 어떨 수 있었는지 아는 이상.

 

  "그런데 내가... 네게 똑같은 경험을 하게 하려는 거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너에게."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라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깊어갈수록, 사랑이 짙어질수록 괴로움도 커져갔으니까. 차라리 순간적인 육욕이나 외로움을 채우려는 절실함 같은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스스로의 삶만으로도 버거운 주제에 어째서 다른 사람까지 마음에 담고 말았을까. 오래 전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한 평범한 삶을 꿈꾸게 돼버린 걸까.

 

  "카를라크, 그건..."

 

  또 다시 지지부진한 언쟁으로 이어질까, 지레 물러서려는 라샤를 카를라크가 제지했다.

 

  "미안, 자기야. 아직 잘 모르겠어. 이 자리에서 널 위해 내 결정을 번복하겠다고 말해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 감정에 휩쓸려 대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생각은 해보려고. 우리에겐 아직 남은 과제가 있고, 늘 그랬듯 어쩌면 엘더브레인과 맞서 싸우는 중에 우리 중 누가 어떻게 될 수도 있고, 그 전에 내 심장이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마음 대로 끝을 내버릴 수도 있는 거지만. 우리는 늘 현재에 충실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일단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래."

 

  라샤의 눈 안에서 수많은 감정이 몰아쳤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감정에 호소해 카를라크를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파고들어 억지로라도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도 가능할 테지. 하지만 라샤는 카를라크를 알았다. 여린만큼 고집있는 그의 연인이 이 정도로 말하는 것도 이미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고마워, 카를라크. 그 말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너는 모를 거야."

 

  라샤는 무릎 꿇은 카를라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와락 품으로 끌어안아 잘게 떨리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키 차이 때문에 자주 볼 일 없는 카를라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라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뤄놨던 피로감이 일시에 밀려들었다.

 

  "그만 돌아가자. 우리에겐 아직 구해야 할 세계가 있잖아. 제대로 쉬어놔야지."

  "...응."

 

  코를 훌쩍이며 일어선 카를라크가 라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철부지 어린 연인들처럼 나란히 손을 마주 잡고 돌아가는 숲길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듯 했다. 내일의 결전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늘 한 고비 넘길 때마다 삶에 감사하는 영웅의 삶 속에서 사랑의 연인의 존재를 등불 삼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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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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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 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 호비 브라운 - 그웬 스테이시 쉽 기반
* 상당한 날조와 선동 포함

 

 

  지구-138에 머무는 생활은 점차 익숙해졌다. 제 집 같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주 놀러가 묵는 친구집 같은 느낌? 첫날 썼던 그웬의 칫솔에는 이제 호비가 준 홀로그램 거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호비는 마치 길고양이를 챙기듯 그웬을 방치하며 돌봤다. 언제 온다간다 말도 없이 들락거리는 그웬을 위해 여분의 침대시트를 늘상 갖춰두고, 냉장고에는 언제나 보관기간이 긴 간편식 종류가 두어 개 들어 있었다. 소파에서 자겠다는 강력한 요청을 몇 번 거절당하고 난 뒤로는 호비의 흔적이 밴 침대에서 자는 데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그웬은 호비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지 쉽게 정할 수 없었다. 피터 이후로, 그웬이 마음을 터놓고 친구가 됐던 건 마일즈가 유일했다. 허나 마일즈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았고, 위기와 모험을 넘나드는 사이에 싹튼 감정이 그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또래에게 느낀 동질감이었을지, 우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는지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대로 지구-1610에 머물며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웬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쉽게 담을 쌓는 성격임을 알고 있었다. 그 대신 한 번 담을 허물고 나면 한도 없이 자신을 내주는 성격이라는 것도. 그런 그에게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딱 편안할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곁을 내주는 호비의 존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웬에겐 굳이 자세히 물어 그들의 관계를 정립할 용기가 아직 부족했다. 그래서 기꺼이 이 느슨한 줄다리기가 주는 안정감을 즐기기로 했다.
 
*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호비의 밴드와 깜짝 객원 공연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좁아터진 호비의 보트에 밴드멤버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왁자지껄하게 뒷풀이를 하고, 다음 곡과 게릴라 콘서트를 벌일 장소를 신나게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고도 그웬은 호비와 한참을 더 떠들다 잠자리에 들었다. 갓 구운 토스트의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일어나 샤워부터 마치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말리던 그웬은 문득 수건으로 몇 번 두들기는 걸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 길어진 머리를 인지했다.
 
  "여기도 미용실 같은 게 있나?"
 
  질문을 던지고 나니 꽤 바보 같은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동네에 머리 자르는 곳이 없을 리가. 욕실 문 너머로 소파 앞에 토스트 접시를 내려놓던 호비가 슬쩍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머리 자르게?"
  "아니, 옆머리가 제법 길어져서..."
 
  흘러내린 윗머리를 손으로 살짝 들추어 보이자 이제는 언더컷이라 부르기 애매한 길이가 된 애매한 옆머리가 드러났다. 문 사이로 빼꼼 들여다본 호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은 젖은 수건을 목 뒤에 두르고 걸어나와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호비는 그웬이 나올 시간에 딱 맞춰서 마시기 딱 좋은 온도의 홍차를 준비하는 재주가 있었다. 과연 영국인이라 이건가. 버터를 발라 구운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물고 우물거리는 그웬에게 호비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내가 밀어줄까?"
  "어?"
  "클리퍼는 케빈한테 빌려오면 돼. 근처에 바버샵이라고 할 만한 게 있긴 한데, 걔보단 내가 잘하거든."
 
  정작 본인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손질한 게 언젠지 짐작도 가지 않는 꼴을 하고서는 제법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여차하면 제시카네 집에 가서 클리퍼를 빌릴까 하는 생각도 했으니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지만, 그웬은 다소 미심쩍어 하는 얼굴로 고민했다. 밑져야 본전이고 실패해도 머리는 다시 자라는 거니까. 안될 것도 없지, 뭐.
 
  마침 바쁜 일정도 없었다. 최근 그웬은 아무 지구에서든 간단하게 할 만한 알바자리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스파이더 소사이어티 본부에서 숙식을 제공한다곤 해도 자잘한 생활비가 안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친구들의 선의에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식당 접시닦이 알바든 바쁜 주말 저녁 배달 알바든 - 스파이더우먼이 배달해준 피자를 드셔보세요! -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며 그날그날 먹고 사는 건 처음에만 좀 힘들었지 금방 적응이 됐다. 본부 임무 짬짬이 알바하랴 호비네 밴드와 공연 준비하랴 제법 바쁘게 지내던 중, 숨돌릴 틈이 필요하다 싶어서 아무 계획 없이 호비의 보트에서 뒹굴거리겠다고 마음 먹은 날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욕실 거울 앞에 간이의자를 놓고 앉은 그웬 뒤에서 호비가 부산스럽게 도구를 늘어놓았다. 케빈이라는 친구한테 함께 빌린 건지 염색약이 덕지덕지 묻고 끄트머리가 헤진 미용가운을 그웬의 목 둘레에 두르고, 클리퍼에 남은 이전 사용자의 흔적을 작은 붓으로 털어내고, 클리퍼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전원을 잠깐 켜보는 일련의 과정을 그웬은 흥미롭게 관찰했다.
 
  "많이 해봤나 봐?"
  "어어. 여긴 뭐든 자급자족하는 녀석들 뿐이니까. 너 같은 얇은 금발은 별로 만져본 적 없지만... 아마 괜찮을 거야."
 
  아마, 라니 남의 머리를 두고 제법 불안한 말을 한다. 아무렴, 미숙하다 한들 우리 아빠만 할까. 그웬은 엉망진창이었던 조지 스테이시의 클리퍼 실력을 떠올리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머리는 또 자라는 거니까.
 
  기타리스트의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가락이 그웬의 가느다란 머리칼을 헤집었다. 밀면 안되는 부분을 따로 틀어올리면 좋을 테지만 당연하게도 호비의 집에 집게 따위는 없었다. 좀 더 머리가 길어지면 머리끈으로 묶어둘 수라도 있을 텐데. 조용한 가운데 딸깍 하고 전원 켜는 소리, 이어서 위이잉 하는 익숙한 클리퍼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그웬은 거울 너머로 호비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는 그웬의 뒤통수를 집중해서 노려보느라 따로 눈을 마주쳐 오지 않았다. 정말 익숙해 보이네. 그 무심한 얼굴에 되레 그웬 자신이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한다."
  "...응."
 
  목덜미 부근에 선뜩한 느낌과 함께 위잉거리는 날이 접촉해왔다. 호비는 머리를 틀어올린 왼손으로 그웬의 머리를 살짝 앞으로 밀며 클리퍼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날을 위로 밀어올렸다. 제법 자란 뒷머리가 바닥으로 사락거리며 떨어졌다. 그웬은 거울 너머로 호비의 집중한 눈을 훔쳐봤다. 연주에 심취해 있을 때 같은 표정이네. 그웬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집중해야 할 곳만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처음 해보는 건 아니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그는 꽤 능숙하게 클리퍼를 다루었다. 어쩌면 그냥 손으로 다루는 건 뭐든 잘 하는 걸지도. 결심하기까지 오래 걸린 시간이 무색하게 클리퍼가 몇 번 위아래를 오가자 얼마 되지 않는 언더컷 부분이 금세 정돈됐다. 몇 번인가 멈추어 긴 머리 부분과의 경계를 확인하고 목 피부가 드러나는 끄트머리 부분에서 날길이를 바꿔 잔머리까지 꼼꼼하게 손질하는 데도 시계를 보니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듯 했다. 그웬은 그 시간 내내 호비의 집중한 얼굴을 관찰했다.
 
  "잘하네. 익숙하다더니."
  "언더컷은 처음이긴 한데, 이 정도는 남자들은 대개 익숙하지."
 
  손질이라곤 영영 한 일 없는 것 같은 머리로 둘러대는 말이 뭔가 우스웠다.
 
  "잘하는 줄 알았으면 더 짧게 할걸 그랬나? 1mm로?"
  "3mm가 제일 보기 좋아. 금방 자란다 싶으면 자주 밀면 되니까."
 
  자기가 자주 밀어준다는 말인 걸까. 그웬은 흘러가듯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이 위잉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끝났어?"
  "아니, 경계 부분 아직 남았어. 지금부터는 움직이면 안 돼."
 
  별 말 아닌데도 그웬은 작게 심호흡 하고는 그대로 흡 하고 숨을 죽였다. 호비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경계 부분은 자칫하면 멀쩡한 머리를 왕창 뜯어먹을 위험이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아버지한테 처음 머리를 맡겼던 날의 경험으로.
 
  '여기는 좀 까다롭구나. 날을 옆으로 기울여 볼까?'
  '음, 미용사들은 그대로 하던데요, 보통.'
  '그 사람들은 전문가잖니. 잠깐, 움직이지 말고. 아, 이런...'
  '...'
 
  잡으면 그대로 붙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부친의 손이 허망하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뭉치를 붙잡았다. 그웬은 처참한 표정으로 손거울을 들어 뒤통수를 비추었다. 원래 있던 언더컷 라인에서 눈에 띄게 삐죽 올라간 밀린 머리가 보였다.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한 부친이 그웬과 눈을 마주쳤다. 허공에서 위이잉 작동중인 클리퍼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꿨다.
 
  '...머리는...또 자라니까요.'
  '...미용실 비용이 얼마랬지?'

 
  미용사가 새로 설정된 언더컷 라인을 따라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어준 뒤에도, 그웬은 부친에게 다시 머리를 맡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경계부를 다듬는 요령을 터득하기까지 그웬의 언더컷 라인이 2cm 정도 위로 올라간 건 사소한 부산물 같은 거였다. 둘 사이가 날로 서먹하고 어색해져 가는 사이에도 2주에 한 번, 일요일 저녁이면 그웬은 거울 너머로 집중한 얼굴의 부친이 클리퍼를 다루는 모습을 지켜봤다.
 
  긴 머리칼을 틀어올리는 호비의 왼손이 한층 단단하게 그웬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날을 바싹 붙이면서 본인도 몸을 기울여 머리 위로 가까이 고개를 숙이자, 나직하게 내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보이는 건 호비의 얼굴이 아닌 그의 풍성한 머리칼이었다. 망부석이라도 된 양 뻣뻣하게 굳은 그웬의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클리퍼가 뒷머리에 닿았다. 시원시원하게 밀던 아까와 달리 여러 번에 나눠서 경계부를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클리퍼의 궤적에 그웬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 버리고 머리 뒤의 감각에 집중했다. 머리를 붙든 호비의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가락, 특유의 체취, 스파이더 센스를 간질거리게 만드는 동질감 같은 게 더 세밀하게 느껴졌다. 미용사나 부친에게 머리를 맡길 땐 자각한 적이 없었는데, 생판 남에게 등 뒤를 맡기는 느낌이 생경했다. 툭, 툭 하고 정교한 작업을 하듯 섬세하게 경계부를 정리하는 호비 역시 집중하느라 숨을 참는 것 같았다. 달칵, 하고 클리퍼 전원이 꺼지고, 얕게 숨을 내쉰 호비가 뒤로 물러났다. 그웬도 그제서야 붙들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클리퍼 대신 큼직한 브러쉬를 집어 든 호비가 그웬의 목덜미를 툭툭 털어냈다.
 
  "그거 미술용 붓 아냐?"
  "정확히는 페인트용 붓이지. 그래피티용. 걱정 마. 새 거야."
  "..."
 
  그는 귀퉁이에 금이 간 낡은 거울을 들어 그웬이 볼 수 있게 뒷모습을 비쳤다. 제법 깔끔하게 정돈된 민머리가 보였다. 그웬은 손을 들어 까끌거리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별말씀을."
 
  그 뒤로 2주 뒤, 또 2주 뒤, 호비와 그웬 사이에 정기적인 약속이 생겼다. 그가 늘 호비의 지구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스의 우주, 혹은 본부에 있는 임시 숙소, 가끔은 마고와 함께 밤새 영화를 보다가 의자에서 쪽잠을 자는 날이라도 세수하고 나서 습관처럼 까끌한 뒤통수를 만지다 보면 슬슬 때가 됐구나, 하고 호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떤 마음은 그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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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깜장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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